문명 6

[문명 6] 전략게임의 일반법칙: "가까우면 벙커링, 멀면 더블"

최적내정 2022. 10. 8. 23:11

전(前) 프로게이머 전상욱

 

스타크래프트와 문명 시리즈는 실시간과 턴제라는 차이가 있음에도 전략 게임이라는 큰 범주에 들어간다. 그래서 스타크래프트에서 통용되는 개념이 문명에서도 적용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상욱 선수가 남긴 "가까우면 벙커링, 멀면 더블"이라는 발언은 스타크래프트는 물론이고 문명 시리즈를 포함한 러쉬 거리와 생산이라는 개념이 있는 대다수의 전략 게임에 두루 적용되는 명언이다.

 

맵에 유불리가 없다는 가정 하에 플레이어 A, B가 같은 빌드를 사용하면 같은 때에 병력이 나오고, 서로 공격을 보내면 정 중앙에서 만나게 된다. 여기서  A는 러쉬 거리의 중요성을 먼저 파악해 스타크래프트의 일반적인 러쉬 거리인 약 30초를 활용하기로 했다. 일꾼 둘 정도를 더 뽑으면서 병력을 그만큼 늦게 뽑는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 A는 B보다 일꾼 둘이 일하는 만큼의 자원 격차를 낼 수 있으며, B의 공격대가 A의 진영에 도착할 때 A의 수비 병력은 딱 맞춰서 준비된다. A의 입구를 막고 있는 B는 점차 물량 차이로 밀려나 게임을 그르치게 된다. 물론 실제 게임 양상은 변수가 많아서 곧바로 B의 확정적 패배로 이어지진 않는다. 실제 게임에서 일꾼 둘의 차이는 서로 일꾼이 부족한 상황이 아니라면 A가 근소하게 우위를 점하는 수준에서 그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A는 좀 더 배를 째기로 한다. 일꾼도 공격력이 약할 뿐 공격 기능이 있는 유닛이니 초반 수비에 활용하고, 건물 심시티를 통해 최소 비용으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수비력을 갖춘 앞마당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개념 및 전술의 발전으로 고작 30초 짜리 러쉬거리에서 과거 개념으로 한 2분 정도는 되는 러쉬 거리인 것처럼 배를 째는 것이다. 그럼에도 평범한 수로는 응징이 안 되니 B는 뒷심 부족으로 연패를 거듭한다. 이제 B의 선택은 두 가지로 좁혀진다. A처럼 똑같이 째거나 혹은 상식을 벗어난 초반 러쉬를 가거나. 여기서 배를 째는 게 더블이고, 상식을 벗어난 초반 러쉬는 벙커링에 해당한다. 물론 벙커링 자체는 날빌에서 시작했지만 정석 빌드를 타더라도 상대 저그에게 압박을 넣을 수 있는 범용성 좋은 전략이다. 

 

이 발언이 나왔던 당시의 테란은 뭘 골라도 손해를 보는 양자택일을 저그에게 강요해 압박할 수 있었다. 테란의 앞마당을 확인한 저그가 확장을 따라간들 자원의 잠재적인 격차는 좁혀지기만 한다. 테란만 본진 플레이를 하는 상황은 저그가 잠재적인 자원 격차를 2배로 낼 수 있지만, 두 종족 모두 확장을 하나 더 가져가는 상황은 잠재적인 자원 격차를 1.5배로 줄인다. 잠재적인 자원량만 놓고 봐도 테란의 1차 진군의 상대적인 위력이 33% 증가한 것이다. 그렇다고 방어에 특출난 강점을 지닌 테란을 상대로 올인 러쉬를 하는 것은 사거리가 가장 짧은 종족인 저그에게 꽤나 부담스러운 선택이다. 그렇다면 저그에게도 극단적인 배째기 빌드인 노 스포닝 3해처리는 어떨까? 안타깝게도 테란은 배럭을 먼저 짓기에 더블을 하더라도 벙커링이 가능하다. 괜히 새 시대의 정석이 된 것이 아니다. 이런 테란의 기세는 마주작의 3해처리 운영과 이제동의 벼리고 벼린 뮤탈 컨트롤이 나타나서야 누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영호가 원배럭 더블커맨드를 가장 먼저 마스터하면서 저그 상대로 다시 기강을 잡아나갔다.

 

그렇다면 문명에서도 전상욱의 명언은 유효할까? 고난이도에서는 AI의 초반 전투력이 더 뛰어나기에 플레이어가 초반에 강한 문명을 고르지 않는 이상 "벙커링"을 하는 상황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플레이어는 "더블"을 통해 AI와의 내정 격차를 줄이면서 가까운 AI의 벙커링을 막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난이도 보정이 사라진 환경에서 플레이어는 벙커링보다 몇 곱절 악질적인 초반 플레이를 선보일 수 있다. 당장 생각나는 문명만 하더라도 고대 시대에 모든 것을 몰빵한 수메르나 남의 전사를 잡아서 건설 노예로 부려먹는 아즈텍, 성벽만 없으면 도국 먹방부터 들어가는 독일과 징병의 신 헝가리까지, 멍청한 AI를 괴롭힌 수단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문명의 수에 걸맞게 다양하다.

 

즉, 전상욱의 명언이 전략게임의 일반법칙에 해당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를 일반적인 전략 게임 전반에 활용할 수 있다. 아직 필자가 1도 해보지 못한 휴먼카인드나 아직 나오지도 않은 문명 7은 물론이고, 완전 처음 해보는 실시간 전략 게임조차 스타크래프트 전략의 역사를 꿰고 있으면 빠른 시일 내에 고수가 될 수 있다. 마치 마스터 키(Master Key)와 같은 위력을 지닌 일반법칙은 게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분야의 일반법칙을 두루 섭렵할수록 빠른 적응력을 보이는 유능한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